[GL]단편집

은수는 모텔을 갈지 노래방을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어디야? 집에 아무도 없다고! 빨리 안 들어 와?" "엄마 아빠는?" "아침에 뭐 들었어? 오늘 밤부터 일요일까지 엄마 아빠 여행이잖아." 지금 통화 중인 상대는 동생 은지다. 현재 고3인데 툭하면 언니하고 맞먹으려고 든다. 학원 끝나고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며 은수에게 호통치고 ...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 선택한 미국행이었다. 아웃팅의 부담없이 쾌락만 즐기고 싶었는데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쾌락은 없고 레즈라는 사실만 들켰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상대에게. '망했다.' 은수는 남들은 쉽게 하는 연애를 자신은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 걸까 생각하며 절망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동이 ...

두 사람은 영주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었고 먹다 남은 술과 포장용기만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은수와 영주는 서둘러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충 깨끗해지자 영주는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 은수에게 하나 건네 주었다. 은수는 책상 위에 맥주를 놓고 의자에 앉았다. '또 술이야. 술을 물보다 더 마셔.' 은수는 영주처럼 술을 음료수처럼 마시는 ...

명목상 어학연수였지만 은수의 미국행은 영어를 배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영어는 어렸을 때부터 해온 거라 소통에는 문제 없었다. 영어시험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한국학원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한 달 동안 영어를 배우면 얼마나 배운다고...' 답답해서였다. 미국은 다르지 않을까?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 그들과 소통하면 답답한 마음이 시원하게...

은수는 고기가 먹고 싶다는 예나를 데리고 학교 근처 고깃집에 왔다. 학생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가성비가 좋은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우리 술 마실까?" 예나가 말했다. "맥주? 소주?" "소주." 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잔 하나를 예나 앞에 놓고 소주를 가득 부어 주자 예나가 방긋 웃었다. 은수가 소주병을 ...

유정이와 나는 어릴 적 친구다. 유정이를 처음 만난 건 유치원 때였다. 그때 유정이의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무뚝뚝한 얼굴, 터질 것 같은 볼살, 볼록 튀어나온 통통한 배, 손에 쥔 과자를 얼른 먹고 난 후 내 손에 있는 과자까지 노리는 탐욕스러운 눈, 그 외의 보통 때는 약간 멍청해 보이는 얼굴. 절대 호감형은 아니었다. 귀엽지도 상냥하지도 예쁘지도 영리...

나는 기숙사에서 살다가 잘 맞지 않아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자취한다고 하니 친구들이 선물을 준다며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엉뚱하게 티비 동농에서 본 앵무새가 생각났다. "말 잘 하는 앵무새가 있으면 좋겠어. 외출하고 돌아오면 인사도 하고 심심하면 대화도 하고. 키우면 재미있을 거 같아."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학생 신...

올해도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이 모였다. 드디어 성인이 되는 날이다! "근데 넌 연애에 관심없어?" "맞아. 얜 왜 애인이 없지? 얘가 누구 좋아한다는 말 들어 봤니?" "아예 그쪽으로는 관심 없는 거야? 무성애자야?" "무성애자? 그게 뭔데?"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포르노 같은 거 몰래 보는 건 아니지?" "쟤는 머리만 빨리 자라는 ...

지금 열차가 들어 오고 있다는 방송을 듣고 전력 질주하며 계단을 뛰어 올랐다. 문이 닫히려는 아슬아슬한 순간 몸을 문 안으로 밀어 넣고 주변을 둘러 봤다. 빈 자리가 있길래 얼른 가서 앉았다. 이제부터 내리는 곳까지 눈을 감고 가면 된다. 눈은 감았지만 귀는 열어 뒀다. 겉으로 보기엔 자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을 감고도 느낄 ...

"선배~, 3260." "응? 3260이 뭔데?" "제가 자취하는 곳 비밀번호예요. 그냥 누르고 들어 오시면 돼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노트 여백에 자신의 주소를 적고 갔다. 내가 신입생이었던 작년, 춤이나 노래같은 거 전혀 할 줄 모르는 나에게 장기자랑 시간은 고통이었다. "노래 불러 봐." "할 줄 아는 노래가 없는데요." "그럼 춤을 추든가." "...

지금 열차가 들어 오고 있다는 방송을 듣고 전력 질주하며 계단을 뛰어 올랐다. 문이 닫히려는 아슬한 순간 몸을 문 안으로 밀어 넣고 주변을 둘러 봤다. 빈 자리가 있길래 얼른 가서 앉았다. 이제부터 내리는 곳까지 눈을 감고 가면 된다. 눈은 감았지만 귀는 열어 뒀다. 겉으로 보기엔 자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을 감고도 느낄 수 ...